THE BEST SIDE OF 부천 역사

The best Side of 부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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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향토사에 앞서 우리나라에 있는 지방향토사를 두루 섭렵해 온 과정에서 잘못된 해석 등 여러가지 오류가 많이 발생된 것을 보아왔다.

이 시도는 조선 중종 때 김안로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 인천 연안에서 인천과 부평의 경계인 원통이고개와 부천을 지나 한강으로 연결시키려는 것이었다.

소사역이 설치됨에 따라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이주해서 여객을 상대로 한 접객업소와 음식점 등이 생겨났으며, 성주산 서쪽 기슭으로는 가로촌(街路村) 형태의 취락이 발달하였다.

해방 후에는 본격적으로 교육에 뜻을 키워 인재를 기르는데 큰 노력을 하셨습니다.

시인은 향수와 더불어 살아생전에 호수, 유리창 등 수많은 대표작을 남긴 현대시의 대부이자 천재 시인입니다. 이렇듯 문학의 역사인 정지용 시인이 부천시에서 업적을 세운 사실을 아시나요? 

원종동 주변지역에 '큰능골', '작은 능골', '능고개'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지명은 왕이 죽으면 쓰는 무덤인 '릉(陵)'의 지명이라는 점에서 '먼마루'라는 원종동의 지명 유래는 유서 깊은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지도나 위성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인천도호부의 영역이었던 남구, 연수구, 남동구 일대와 부평도호부(구한말 대개편 이후: 부평군)의 영역이었던 부평구, 계양구 일대는 산줄기로 분리되어 있다.

축제에서는 코믹월드와 마찬가지로 개인 코스프레도 볼 수 있다. 코믹월드와는 달리 청소년 위주를 포함하여 어린이와 가족 위주의 방문객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밀코어들에게는 규제도 없고 중화기도 가지고 올 수 있어 밀리터리 코스프레 비중이 상당히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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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는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에 인접해 있다. 동쪽과 북쪽은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구로구와 닿고, 남쪽은 경기도 시흥시·광명시와 경계하며, 서남쪽은 인천광역시 계양구·부평구 및 남동구와 접한다. 한강 하류에 인접하여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시대 이후 지금까지 수도의 주변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이 고구려의 '잉근내군(仍斤內郡)'으로 '잉근(仍斤)'은 '임금'을 뜻하듯이, 괴안동은 아주 크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고얀리'라고도 하는 것은 '괴'를 음성학적으로 재구성하면 '고얀리'가 되기 때문이다.

지역신문이나 일부 부천시민들은 옛 부천군의 영역이 인천 계양구, 부평구를 비롯하여 인천 대부분을 아우르는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부천군과 지금의 부천시는 명칭과 아주 약간의 행정구역(소사읍, 오정면)만을 계승했을 뿐 사실상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신설 부천 휴게텔 당시 부천군청은 인천 관교동 인근에 있었으며, 부천군이라는 행정구역이 조선총독부가 마개조해 만들어진 억지에 가까운 행정구역, 사실상 이름은 부천이지만 (뒤에 인천으로 편입되는) 인천의 외곽지역 읍면들을 관할하는 편의상의 행정구역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일설에 의하면 고주몽의 이복 형인 비류왕이 인천에 정착하려다가 기후와 토양이 맞지 않아 부족을 이끌고 서울에 풍납토성으로 이동하여 백제의 온조왕과 합류하기 위해 이주하던 도중에 부족들이 인천 연수동과 논현동(옛 명칭은 '범아가리'로 포구를 뜻함), 송내동의 '한부족', 목동의 '솔안말' 등지로 흩어지면서 백제의 초기언어로 지명이 형성됐다는 주장도 있다.

학식이나 인식이 부족하지만 그동안 부천 향토사를 공부하고 연구해온 자료를 토대로 부천의 향토사 알리기에 앞장섰고 부족함이 많지만 나름대로 가감없는 향토사 집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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